세상은 넓어도 자기 한 몸 깃들 자리는 없었다. 난세가 인물을 낸다고는 하나, 인물이 난세를 이길 수는 없는 법이다. 때는 춘추전국 시대. 주린 배를 움켜쥔 무지렁이들이 난을 피해 이리저리 떠돌았다. 질긴 목숨을 탄식하면서도 그 명줄 연장하고자 이들로 실같이 이어진 길은 늘 복잡했다. 그는 50을 지천명(知天命)이라 했다. 하지만 하늘도 그에게 명을 다 보여주진 않았음이 분명하다. 천명을 안다며 길을 올랐지만 이순(耳順. 60세)이 훌쩍 넘었어도 여전히 실핏줄처럼 맺고 풀어지는 길 위에 있었다. 그 동안 70명이 넘는 왕들과 제후들의 궁과 뜰을 기웃거렸었다. 하지만 아무도 그를 머물게 하지는 않았다. ‘덕’이니 ‘인’이니 하는 왕도는 제자들의 좁은 가슴에나 우렁찼지 골목에만 나가도 상갓집개 짖는 소리가 더욱 컸다. 결국 그는 노구를 이끌고 나고 자란 본국, 노 나라로 향하는 길에 올랐다. 다들 알겠지만 지금 공자 이야기를 하는 중이다.
일행이 공곡(公谷)을 지나고 있었다. 공곡이 실명인지 아니면 인적 없는 빈 골짝인지는 그 시대 사람은 알았을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아는 것은 그곳이 향으로 가득했다는 것이다. 그는 가시덩굴 가운데 한 무더기의 난을 보았다. 기를 쓰고 살아낸 덕에 향은 깊고 그윽했다. 하지만 알아주는 이 없음이 공자의 마음을 아프게 했다. 그는 유란에서 자신의 신세의 처량함이 느껴져서 슬피 울었다. 노년의 곡이 더욱 애잔한 것은 눈물은 없고 소리만 있음이다. 그 소리가 공곡유란(空谷幽蘭) 의란조(倚蘭操)다. 그런데 이 노래에서 비로소 짠 맛을 느낀다.
習習風俗光陰以雨, 골짜기바람 살랑대며 부니 날 흐리다가 비까지 내리네.
之子于歸遠送于野, 가던 길 뒤돌아 가려하니 저 먼 들까지 배웅 하누나
何彼蒼天不得其所, 푸른 하늘은 어이하여 날 버리는가,
逍遙九州無有定處, 정처 없이 천하를 떠도니 오갈 데 없는 신세로다.
世人闇蔽不知賢者, 세상 사람들 어둡고 마음이 막혀 어진 이를 몰라 본다네
年紀逝邁一身將老, 세월은 빠르게 흘러가고 이 몸만 늙어 가는구나.
노중에건 길 끝에건, 그는 자신의 발걸음이 필시 천명에 닿으리라 확고히 믿었다. 하지만 하늘이 버렸는데 어찌 한단 말인가! 길과 자아는 합치될 수 없는 영원한 타자였고, 늙어가는 육신은 길 위의 세월을 감당하기엔 점점 버거웠다. 돌아보면 슬펐고 내다보면 막막했다. 지난 수 세기 동아시아 사람들이 붙들고 살아온 유교의 윤리는 이런 막막함 속에서 탄생했다.
갈릴리에는 ‘예수의 발자국’이란 순례길이 있다. 예수께서 고향 나사렛에서 갈릴리 호수 변의 도시 가버나움까지 약 65키로 길을 일컫는다. 나사렛은 구약성경을 비롯해서 고대 유대 문헌 어디에도 소개된 바 없는 오지 마을이다. 큰 뜻을 펴기에는 보다 큰 도시가 필요했다. 가버나움은 지중해와 내륙 시리아 안디옥을 잇는 국제 무역로가 지나는 길목으로 갈릴리 파도소리가 부지런히 쓸고 닦아 도로는 반짝거렸고 건물들은 화려했다. 성경에는 별도의 언급은 없지만 고향을 오가며 장자로, 맏형으로 자신의 책무를 다했을 것이다. 그리고 일년에 세 번은 명절을 지키기 예루살렘 성전에 올라가 절기를 지켰을 것이 분명하다. 혹자는 그가 평생 걸었던 길이 적어도 지구 한 바퀴 거리는 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도 길 위의 삶을 살았다고 할 수 있다.
길이란 나그네에게 피곤한 여정을 풀어놓는다. 목적지에 이르러야만 길손에게 비로소 안식이 찾아온다. 하지만 예수가 걸었던 길은 여정이 아니었다. 그도 길 위에서 길을 걸었지만 그 자신이 길이었다. 그는 자신에 대해 말했다. “내가 길이고 진리이며 생명이다.” 예수님에게는 길은 진리였고 그분 자체였다. 이게 무슨 말인가 싶을 것이다. 그를 만났던 사람들은 보면 알 수 있다. 성경은 그 길 위에서 목마른 여정을 끝낸 사람들의 이야기로 가득하다.
그렇게 예수를 만난 이들을 그리스도인이라 부른다. 이 호칭은 예수께서 부활하신 후 10년이 지난 즈음 안디옥 성도들에게 처음으로 붙여졌다. 그렇다면 그 이전의 그리스도인들, 혹은 안디옥 밖에서 그들은 뭐라 불리웠을까? 초기 역사서인 사도행전에 따르면 ‘길’은 예수님이고, 그리스도인은 ‘그 길에 속한 자들’(9:2)이다. 그들의 정체성은 길과 분리되지 않는다.
길 위에서 윤리와 철학, 종교가 나왔다. 누가 길을 가르쳤는가에 따라 그 길을 따랐던 이들이 사용하는 단어들이 조금씩 차이가 난다. 공자가 제시한 길에 선 이들은 천도, 인도, 왕도란 용어가 익숙할 것이다. 부처님의 길에는 도반, 팔정도, 도량이 그러할 것이다. 이들에게는 길과 나는 분리된다. 길은 길 대로 나 있어서, 그들이 제시하는 어딘가로 우리 각자는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야' 한다.
기독교는 어떤가? 예수님이 길 자체이다. 그 길은 진리다. 이 길 위에 선 순간 여정과 목마름은 끝이 남을 경험해 본 이는 다 안다. 돌아보니 그때 길 위에 선 내 가슴은 시렸고 청춘은 아팠다. 지금은 길 안에서 안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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