탕부 하나님! 탕부라니? 생뚱 맞은 책 제목에 놀랐을 것이다. 팀 켈러는 책의 머리 부분에 이렇게 설명을 달았다.
‘탕자’(蕩子)로 번역되는 형용사 ‘prodigal’은 ‘제멋대로 군다’라는 뜻이 아니다. Merriam-Websters 에 의하면 ‘무모할 정도로 씀씀이가 헤프다’이다. 즉 ‘하나도 남김 없이 다 써버리다’이다. 따라서 이 단어는 비유 속의 둘째 아들만이 아니라 아버지를 수식하는 말로도 어울린다. 아버지는 아들의 죄를 따지거나 그에게 죄의 책임을 ‘돌리는’ 응보를 전혀 하지 않는다. …. 예수님은 이 비유를 통해서 하나님께서는 앞뒤를 재지 않고 아낌 없이 다 내어주는 분임을 보여준다. 그런 의미에서 그분은 자녀인 우리에게 그야말로 탕부이다(p. 20).
제목에서 눈치 챘을 것이다. 이 책은 한 때 탕자의 비유로 널리 알려졌던 눅 15장 두 아들의 비유를 해설한 책이다. 요즘은 이 비유에서 둘째 아들의 방탕에 초점을 맞춘 설교나 책들은 찾아보기 힘들다. 유대적 배경이 해석에 적용되면서 두 아들 모두 탕자임이 드러났다. 반대 급부로 착한 맏아들의 죄악상을 드러내는 글들이 더 자주 보여진다. 제목도 그럴싸하게 ‘두 탕자 비유’이다. 그런데 만약 ‘prodigal’을 저자의 의견을 받아들인다면 ‘탕부자(蕩父子) 이야기’로 해야하지 않을까?
비유는 두개의 막으로 구성된다. 제1막에서는 둘째 아들이 부친이 돌아가시기도 전에 유산을 받아 타국으로 가서 탕진한 후 굶어 죽게 되자 속죄하는 마음으로 귀향한다. 죽은 줄 알았던 아들이 살아 돌아온 것을 감사하여 부친은 동네 사람들을 불러 모아 송아지를 잡고 큰 잔치를 벌였다. 2막은 큰 아들의 반응이다. 그는 부친의 뜻에 순종하여 늦도록 밖에서 일 하다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동생의 귀향 축하연이 벌어진 것을 알고 분노하여 참석을 거부한다. 그러자 부친이 밖으로 나와 큰 아들을 달래는 장면으로 비유는 끝이 난다.
여기서 궁금증이 하나 남는다. 큰 아들이 부친의 설득을 받아들여 잔치에 참석했을까? 질문의 답은 맨 마지막에 주어질 것이다.
1. 집 나간 탕자: 둘째 아들.
비유의 막이 열리는 순간부터 청중들은 큰 충격을 받게 된다. 이 아들이 부친에게 자기 몫의 유산을 요구했다(눅 15:12). 당시 유산은 부친이 죽은 후에 분배되었다. 생전에 이를 요구하는 것은 생존해 계신 부친을 죽은 인간 취급한 것이다. 부친을 개무시한 셈이다. 한 마디로 이 아들은 아버지의 재산만을 원할 뿐이다.
부친의 반응도 충격적이다. 엄격한 가부장 사회에서 자식이 부모를 공경해야 하는 것은 더 없이 중요했다. 이런 자식이라면 매질을 해서 집에서 내쫓아야 했다. 동네 사람들이 알았다면 이 아들은 조리돌림을 당했을 것이 분명하다. 그런데 부친은 살림을 각각 나눠주었다(눅15:12). 그런데 여기에 주목할 단어가 ‘살림’이다. 헬라어, ‘비오스’ 즉 생명이란 단어다(p. 45). 재산을 일컫는 보다 구체적인 다른 단어들이 있건만 하필이면 얼마 남지 않는 부친의 목숨인 생명이라고 했을까?
땅은 여호수아 때부터 물려받은 것이다. 윗대에서 물려 받았고 다음 후손에게 물려줄 것이었다. 설령 가세가 기울어 팔려가게 되었다 해도 이 역시 가까운 친척의 도움으로 되찾아와야 할 대상이었다. 이런 문화적 배경을 가진 나라이니 땅은 곧 부친의 생명이라 해도 과언은 아닌 셈이다. 하지만 아버지는 그런 자식의 요구를 받아주었다. 그런데 그 아들은 이 땅을 팔아서 떠났다. 연로한 부친은 아들에게 거부를 당했고, 존엄마저 짓밟혔다. 하지만 참고 견딘다(p. 47).
저 멀리 아들이 돌아오는 것을 처음 발견한 이는 아버지였다. 어찌나 기다렸고 보고 싶었던 아들인가! 아들에게로 달려갔다. 그래 맞다. 아버지는 달려가 아들을 맞았다. 아니 이는 결코 맞지 않는 행동이다. 고대 사회에서 한 집안의 가장은 품위를 소중하게 생각했다. 어쩌다 빨리 걷는 법은 있어도 달리는 일은 없었다. 겉옷이 들춰져서 맨 살을 드러내는 일은 수치였다. 그런데 아버지는 그렇게 했다. 아들을 끌어안고 입을 맞추었다(p. 49). 마땅히 지켜져야 할 부친의 근엄함도 찾아볼 수 없다. 부친은 종들에게 세 가지를 명령했다. ‘제일 좋은 옷을 내어다가 입혀라. 손에 가락지를 끼워 주라. 발에 신을 신겨라’(눅 15:22). 당시 노예는 신발을 신지 않았다. 그에게 신발을 신겼다. 게다가 제일 좋은 옷을 입히고 가락지를 끼웠다. 이 두 가지는 모두 부친의 것들이 분명했다. 부친은 노예로 돌아온 아들을 다시 아들로 신분을 회복시켜 주었던 것이다.
2. 집 안의 탕자: 큰 아들.
집 문 앞에 이른 형은 이 모든 일을 전해 듣고 격노했다. 문 밖에서 큰 아들이 들어오지 않는다는 말을 듣고 부친은 연회의 상석을 비워두고 문밖에 나가 큰 아들을 설득했다. 여러 사람들이 지켜보았을 수도 있는 일이니 여간 위신이 깎이는 일이 아니었을 것이다. 큰 아들은 부친을 향해 불편한 심기를 여지없이 드러냈다. 맏아들이 이토록 격노한 이유는 무엇인가? 큰 아들의 말에 답이 있다.
(눅 15:29-30, 개정) (29) 내가 여러 해 아버지를 섬겨 명을 어김이 없거늘 내게는 염소 새끼라도 주어 나와 내 벗으로 즐기게 하신 일이 없더니 (30)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 이를 위하여 살진 송아지를 잡으셨나이다
살진 송아지는 하나의 상징이다. 동생을 아들로 맞아 들임으로서 다시 상속자가 되었다. 부친이 죽으면 재산은 3등분으로 나눠 2/3은 큰 아들 몫이었다. 동생은 자기 몫을 다 탕진한 상태이다. 그런데 그를 다시 아들로 받아들이게 되면 자기 몫이 또 줄어들게 된다. 그래서 형이 이렇게 말하는 것이다. ‘이미 동생은 자기 것을 다 받았습니다. 지금 재산은 모두 제 것입니다. 이제는 아버지께서도 제 허락 없이 둘째를 아들로 받아 들여서는 안됩니다.’
아들의 분노가 얼마나 컸던지 부친을 대하는 기본 예의조차 저버렸다. 당시 문화에서 부친을 부를 때는 극진한 예를 갖춰야 했다. 특히 남들 앞에서는 더욱 그러했다. 그런데 큰 아들은 ‘아버지!’하지 않았다. ‘이봐요!’(look!)했다(ESV. he answered his father, 'Look, these many years I have served you. 개역 성경은 아예 번역 조차 하지 않았다). 큰 아들은 아버지를 아버지라 부르지 않았다.
예수님께서 여기까지 말씀하셨을 때 청중들은 입에 침이 다 말랐을 것이다. 이 악한 큰 아들을 부친은 어찌 대할 것인가? 틀림없이 부자의 연을 끊었을 것으로 속단했을 사람도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이번에도 아버지의 반응은 놀람 자체였다.
“아들아”(my son!)
개역 성경에는 ‘예야!’로 번역했다. 하지만 둘 다 헬라어 ‘테크논’의 의미를 제대로 살리지 못했다. 어린 자식을 부르는 애칭이다. 불효 막심한 큰 아들도 인자하신 아버지에게는 철없는 어린 자식에 불과했다.
그렇다면 비유에 담긴 뜻은 이것이다. 두 불효자 모두 아버지께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사랑스런 자식이란 뜻이다. 예상을 뛰어넘는 부친의 사랑이 심금을 울린다. 비유는 여기서 끝이 났다. 하지만 글의 서두에 지적한 질문에 대해 끝내 답을 주지 않는다. 당시 청중들 역시 답변을 듣지 못해 몹시 아쉬웠을 것이다.
하지만 답은 본문에 암시되어 있다. 이 비유를 시작할 때에 예수님의 청중들이 누구였는지를 살펴보라(눅 15:1-2). (읽고도 통 짐작이 안 가신다면 담임 목사님께 물어 보시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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